조선의 정치질서를 유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 익숙하다.「예와 충을 다하여 군을 섬기고 인과 의를 더하여 민을 위한다」는 논리는 그러나 이제 설득 기반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직도 옳다고 믿고 있는 그것 은 습속의 껍데기이자 내다 버리기 싫은 익숙함 의 또 다른 얼굴은 아닌가 알아서 엎드리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란 공포 때문에 나라에 대한 두려움 더욱 컸고 이를 진작부터 간파한 권력은 되레 그 속내 가리려 유교에서 다스림의 외피를 구했던 건 아니었을까. 유교는 핑계였고 그렇다면 실질은 따로 있었던 걸까. 이 글은 가능한 논의의 대안을 죄와 벌 의 통치 공학에서 찾는다. 공포에 의한 타율적 복종이 자발성의 가면을 빌리고 왕실 권위를 정점으로 한 지배세력의 힘이 민중 전체를 강박처럼 압도할 때 체제의 존치는 의외로 수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극히 부자연스러웠다는 데 이 글은 주목한다 유교국가의 정치질서를 법가의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필자는 이를 위해 특히 조선의 형벌을 눈여겨본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추상같은 통제의 문법을 구축하고 일벌 백계의 강고한 의지를 민중에 과시함으로써 권력자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 벌 은 정치적 강자의 지배도구였고 죄 는 이를 영원 히 제도화할 수 있었던 절호의 핑계였다 더욱이 권력이 강고 있는 것을 빼앗겠다고 서슴없이 넘보며 덤벼드는 이들 앞에서 자기 수호와 온갖 통치의 기제는 본능적으로 마련되고 있던 터였다. ...